본문 바로가기

뉴질랜드 (New Zealand)/걸어서 뉴질랜드속으로

<Day 12: 왕가누이> 뉴질랜드 북섬 뚜벅이 여행 16박17일

[ 2020년 12월 27일 일요일 ]

 

여행 12일차: 왕가누이(Whanganui/Wanganui) 

▶Whanganui River

 

 

 

 

 

 

 

 

 

# 08:11 am
오늘은 '뉴플리머스'에서 '왕가누이'로 이동하는 날이다.

 

뉴플리머스 인터시티 버스 타는 곳에 가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내가 머문 숙소 'Duck & Drakes Backpackers'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는 차로 4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이고, 예약해둔 인터시티는 8시 30분 출발 버스였기에 8시에 숙소를 나서면 시간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10분동안이나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버가 잡히지를 않았다. 근처에 운행하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날 타라나키산에 가기 위해 우버를 불렀을때 안 잡힌 이유가 공휴일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뉴플리머스 이 지역 자체에 우버를 운행하는 드라이버가 많지가 않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숙소에서 인터시티 버스 타는 곳까지는 걸어서 13분 정도가 소요되는 멀지않은 거리였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짐들이 너무 많아서 이것들을 다 들고 걸어갈 엄두를 못 냈는데 이때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고,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큰 배낭을 어깨에 메고, 작은 배낭은 큰캐리어 위에 얹어 챙긴 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08:28 am

8시13분쯤 숙소에서 나섰고 나서면서도 내가 과연 제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 최대한 뛰었다.

어디서 그런 천하무적같은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뉴플리머스에서 왕가누이로 가는 인터시티 버스는 하루에 한대뿐이었기에 이 버스를 놓치게 되면 버스비 날리는 건 물론이고, 왕가누이에 예약해둔 숙소 취소비 그리고 이 짐들을 챙겨 뉴플리머스 숙소를 다시 구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 싶었기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런데 뛰기 시작한지 10분쯤 지났을 때 큰 캐리어의 바퀴가 제대로 끌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퀴의 상태를 확인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우선은 그대로 끌고 달렸고, 드디어 저 멀리 초록색 버스가 보였다.

 

기사님 제발 날 봐주세요 제발 제발 !!! 이라고 속으로 외치며 버스를 향해 가고 있는데 캐리어 바퀴가 툭하고 부러지는 느낌이 났다.

 

하... 망했다... 이제 끝났다... 라는 생각이 들던 그때 버스 정류장 쪽에 계시던 어떤 할머니 한분께서 짐 들고 오던 날 발견하시고는 떠나려고 하는 버스의 문을 두들기고 기사님께 저 멀리 짐 들고 오는 승객 한 명 있는 거 같다고 얘기해주시는 듯했다.

 

기사님께서 버스에서 내리시는 순간 한줄기의 희망이 보였고, 떨어진 바퀴를 잽싸게 챙긴뒤 캐리어를 힘으로 질질 끌어서 버스 쪽으로 뛰어갔다. 짐 없이 뛰면 1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에겐 그 시간이 1 시간 같은 느낌이었고, 한쪽 바퀴가 없는 그 무거운 캐리어를 끌 때의 느낌은 마치 뒤에서 누가 날 못 가게 잡아당기고 있는 듯했다.

 

 

 

 

 

 

 

 

 

# 08:30 am

그리고 여기서 진짜 웃긴게 그 부러진 바퀴를 주울 때 손가락을 데었다.

이 세상에 캐리어 바퀴에 손 화상 입어본 적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바퀴가 부러진 상태에서 캐리어를 힘으로 끌었더니 마찰로 인해 열이 나서 결국엔 바퀴가 못 버티고 떨어져 버렸고, 난 거기에 손을 데었다. 사실 크게 데인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욱신 욱신거릴 정도라 신경이 쓰였다.

 

기사님께서 나의 짐을 실어주시면서 원래는 10분 전까지 탑승 완료해야 한다고 혼내셨고, 늦어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린 뒤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니 딱 8시 30분이었고,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 할머니분 아니었으면 난 버스를 놓쳤을 테지... 천사 할머니 ㅜ_ㅜ 너무나도 감사한 분이다.

복 많이 받으세요 할머니♥

 

그렇다.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 (눈물)

 

 

 

 

 

 

 

 

 

 

# 10:55 am

뉴플리머스에서 2시간 반 정도를 달려 왕가누이에 도착했다.

 

이제 저 망가진 캐리어를 챙겨서 예약해둔 숙소로 가긴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캐리어를 새로 사서 짐을 새로운 캐리어로 옮긴 뒤 숙소로 갈지, 아니면 우선 숙소로 먼저 가서 짐을 놔두고 밖으로 나와 새로운 캐리어를 사서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옮길지

 

버스 정류장 뒤쪽에 보니 강이 보였고, 강 근처 벤치에 앉아서 생각 정리 좀 해야겠다 싶었다.

 

 

 

 

 

 

 

 

 

 

# 11:03 am <Whanganui River>

얼떨결에 왕가누이 강 앞에 왔다. 이 정신없는 와중에 끝내주는 날씨

 

먼저 여기서 숙소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알아봤더니 차로는 4분, 걸어서는 17분 걸린다고 나와있었고, 우버 비용이 얼마나 나올까 싶어서 어플로 검색을 해봤더니... 

 

 

 

 

 

 

 

 

# 11:36 am

말도 안 되게도 왕가누이 이 지역에서는 우버 서비스를 이용할 수가 없단다. 하하하하 ㅠ,ㅠㅋㅋㅋ 하하 하하하핳

 

그렇다면... 여기서 숙소까지 17분을 걸어 가야한다는건데 난 도저히 이 망가진 캐리어를 들고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 11:49 am

바로 뒤에 봤더니 i-Site(여행자 정보 센터) 관광안내소가 있었고, 거기에 짐을 맡긴 뒤 새로운 캐리어를 사러 가기로 했다.

 

아이사이트에 가서 내가 처한 현재 상황을 설명 하고 짐을 맡겼다. 짐 보관비는 3불이었고 나중에 짐 찾을 때 그때 계산하면 된다고 했다.

 

 

 

 

 

 

 

 

# 12:11 pm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 웨어하우스가 있었고 Trafalgar Square Shopping Centre 안에 위치해 있었다.

 

 

 

 

 

 

 

 

# 12:18 pm

트라팔가 스퀘어 쇼핑센터 안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캐리어를 보러 웨어하우스로 갔다.

 

 

 

 

 

 

 

 

# 12:47 pm

웨어하우스에서 팔고 있는 다양한 캐리어들

가격도 다 저렴했다.

그렇지만 내 무거운 짐들을 담기엔 너무나도 약해 보였던 캐리어들 ㅜ_ㅜ

제일 먼저 바퀴가 튼튼한 지부터 살펴봤는데 그다지 튼튼해 보이지가 않았다. 캐리어 자체도 너무 얇아서 금방 망가질 것만 같았다.

 

 

 

 

 

 

 

 

# 01:01 pm

웨어하우스에서 나와서 등산 제품을 파는 kathmandu에 갔다.

여기서 70L짜리 바퀴 달린 배낭을 샀다. 제품명은 'Hybrid Trolley v4 - 70L'

마침 박싱데이 세일 중이라 레귤러 가격은 550불 정도였는데 60프로 세일해서 220불에 구매할 수 있었다.

이걸 사면서도 과연 내 캐리어에 담겨있는 짐들이 여기에 다 들어갈까 싶었는데 결국 다 넣었다.

어깨에 배낭으로 멜 수도 있고, 무거울 땐 캐리어로 끌 수도 있는 그런 가방이다. 바퀴도 부드럽게 잘 굴러가고 우선 튼튼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 01:44 pm

왕가누이 i-Site에 맡겨둔 짐을 찾아 밖으로 나왔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구석진 데 가서 하고 싶었으나 손이 두 개 뿐이라 멀리 갈 수가 없었다.

 

 

 

 

 

 

 

 

# 02:10 pm

망가진 캐리어를 보니 타우랑가 인터시티 버스 정류장에서 봤던 어떤 여자분이 생각났다.

 

버스가 도착했을 때 한두 명씩 버스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 여자분도 캐리어를 챙겨 움직이던 찰나 그 여자분이 챙겨 온 캐리어의 손잡이가 통째로 빠져버렸고 그분은 난감해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그때 그걸 보면서 남일 같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나 남일이 아니라 미래의 내 모습이었다.

 

 

 

 

 

 

 

 

# 02:24 pm

새로운 캐리어를 사러 가기 전 i-Site에 짐을 맡겨둘 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캐리어를 새로 사는 건 사는 건데 이 망가진 캐리어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어떻게 버려야 하나

쓰레기통에 옆에 세워둬도 되나...

 

그래서 아이사이트 직원분께 버리는 방법을 여쭤봤는데 내 캐리어가 바퀴는 부러졌지만 다른 건 멀쩡하니 메모를 써서 버스 정류장 쪽에 세워두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거 같다고 얘기해줬고 아주 굳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께서 친절히 메모도 써주셨고 테이프도 붙여주셨다. 왕친절 

 

짐을 다 옮긴 후 헌 캐리어는 메모와 함께 인터시티 버스 정류장에 세워뒀다.

(다음날 가봤더니 정말로 누군가 가져가고 없었다.)

 

 

 

 

 

 

 

 

# 02:35 pm

1차적으로 짐 정리를 마쳤고, 다시 제대로 짐을 챙기기 위해 강가 쪽으로 갔다.

여기서 다시 가방을 열어서 짐 정리를 했다.

안 쓸 거 같은 물건들을 정리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 02:57 pm

자, 이제 숙소로 갈 시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짐을 챙겨 강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무진장 많이 불어서 모자가 휘리릭 날아갈까봐 겉옷에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 썼다.

 

 

 

 

 

 

 

 

# 03:44 pm

어깨가 빠질 거 같아서 걷다 쉬다, 걷다 쉬다 반복했고 17분 거리를 4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숙소는 Braemar House B&B and YHA Hostel에서 난 YHA 호스텔 6 베드 여성 전용 도미토리에 묵었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내일 오전에 왕가누이를 떠나 웰링턴으로 가야 한다. 뉴플리머스에서의 일정을 하루 늘리는 바람에 왕가누이에서의 일정이 하루 줄어서 여기에서 머무는 시간이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한 시각이 이미 오후 4시에 가까웠고, 지칠 때로 지쳐버려서 시내에 나가 관광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왕가누이를 안 둘러보고 내일 바로 떠나기엔 도시가 너무 예뻤기에 여기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고, 아예 전체 일정을 하루 늘리게 됐다.

 

예약해둔 웰링턴 숙소에 연락해서 날짜 변경 요청을 했고, 인터시티 버스 날짜도 수정하고, 왕가누이 숙소비도 하루치 더 지불했다.

 

이로써 총 여행기간이 15박 16일이 아니라 16박 17일 일정이 됐다.

 

 

 

 

 

 

 

# 06:45 pm

잠시 쉬었다가 숙소를 둘러보고 마트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Braemar House YHA Hostel은 주인 분들도 엄청 친절하시고, 숙소도 깨끗하고 너무 다 마음에 들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뉴월드 마트, 카운트 다운 같은 큰 마트들이 걸어서 가기엔 다소 멀다는 점이었다.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뚜벅이는 웁니다...)

 

 

 

 

 

 

# 07:44 pm

뉴월드에서 오늘 저녁에 먹을 컵라면, 내일 먹을 샐러드, 감기가 떨어지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비타민을 보충해줄 복숭아+블루베리, 꿀물 타 먹을 마누카꿀 그리고 감기약도 새로 샀다.

 

 

 

 

 

 

 

 

 

 

# 08:03 pm

마트에서 장본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한참 동안이나 찍었다.

여윽시 뉴질랜드는 구름 맛집

 

 

 

 

 

 

# 11:02 pm

이때까지 먹은 감기약은 Paracetamol 성분이 들어있는 것들이었는데 약을 먹은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감기가 떨어지지가 않아서 Ibuprofen이 들어있는 약을 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뉴월드 마트에서 찾아봤더니 두 성분이 다 들어있는 감기약이 있어서 이걸로 샀다. (뉴질랜드 추천 감기약이다. 'maxigesic' 효과 최고다.)

 

오늘은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뉴질랜드에 와서 오늘만큼 절망적인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힘든 하루였다.

 

손도 데이고, 감기는 떨어지지 않고, 엄지발톱엔 왜 또 멍이 들어있는지... 

몸도 마음도 너무나도 힘들었던 날,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여행을 하고 있지 의문이 들었던 날

너무 지쳐서 그냥 한국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뻔한 그런 날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깐...
시간 지나면 이것도 그저 추억의 일부분이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나를 달랬다.

한숨 푹 잘 자고 나면 또 아무렇지 않아질테니깐